성령충만한 삶을 위하여 #027ㅣ오네시모의 영적자유

 

김서권 목사(좌)와 기독교 잡지 <교회와 신앙>(우)

김서권 목사(좌)와 기독교 잡지 <교회와 신앙>(우)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 앞에 무릎을 꿇은 후 받은 최고의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만남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 앞에서는 '핍박하는 자', '죄인의 괴수'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당신의 계획 속에서 바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만나 주셨고 그를 영광의 광채 안으로 초대하신 것이었다. 이 후 바울은 축복의 만남을 누리면서 로마를 정복하였다.

바울과 함께 갇힌 자 에바브로, 동역자 마가, 감옥에 바울과 함께 있기 위하여 자신을 바울의 종으로 등록시키기까지 하였던 아리다스다고, 바울의 행전을 기록한 누가, 아들 디모데, 북음을 위하여서는 목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었던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그의 주변에 머문 아름다운 사람들이 때로는 그의 아들로, 그의 동역자로, 그의 심복으로 함께 하였던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바울의 서신서 대부분이 이들이 머무는 집과(집이 곧 교회였다!) 그가 사랑하는 교회에 속한 지체들을 향한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대할 때마다, 그때 당시 바울의 살아있는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는 듯한 감동이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 중에서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빌레몬서였다. 그토록 지고한 성경 66권 속에 어찌하여 개인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 한 편이 정경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더욱 그러하였을 것 같다. 빌레몬서를 묵상하다 보면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느낌을 갖는다.

바울이 형제라 칭할만큼 복음적이었던 한 사람 빌레몬, 그 집안에서 노예로 일했던 강직하고 깨어있는 청년 오네시모, 오네시모는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주인의 집에서 탈출한다. 그는 도망할 경비를 충당해야겠기에 적당한 물건을 훔쳤음에 틀림없다. 그는 사람이 많은 도시 로마로 도망쳤음에 틀림없고 그 곳에서 그는 바울을 만났으리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자유, 그 참 의미를 깨달은 오네시모는 바울이 감옥에서 낳은 아들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진리, 곧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분이심을 알았으리라. 바울을 만난 오네시모는 도망친 노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무익한 자에서 유익한 자로, 종의 신분에서 갇힌 중에 낳은 바울의 아들, 즉 영적으로는 자녀의 신분으로 바뀐 것이다. 그 오네시모를 본래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간곡하게 오네시모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 편지 한 장을 정경 안에 넣으셨을까. 이 시대에 무엇을 말씀하시기 위함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영혼구원에 있다. 하나님은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으며 우리 인생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는 우리의 영혼에, 죽음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선포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으며, 영으로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지금도 촉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분명 오네시모를 구하는 것, 오네시모를 찾아 내는 것, 오네시모를 변화시켜 축복된 삶을 누리도록 인도하라는 것, 나아가서는 바울을 도와 로마를 복음화하라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공동체 목회를 하면서 많은 오네시모를 만났었다. 다시 말해 버려진 자, 도망친 자, 소망없는 자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 당시 그들을 믿음의 아들로, 심복으로(very heart), 더욱이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일단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내 자신이 바로 그때 오네시모였기 때문에 오네시모가 오네시모를 변화시키기엔 좀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또한 오네시모인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나, 다른 오네시모를 변화시키는 것이 곧 '내가' 해야하는 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잔뜩 경건의 모양을 갖추려 힘썼고 어려운 중에도 선행을 베풀고 구제하여 그들을 먹이고, 입히려 열심을 다 했다. 그나마 안타깝게도 '내가' 하는 일은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잃은 나의 공동체 목회는 갖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난 밝히 알게 되었다. 오네시모의 특성을 지닌 나, 내 자신이 완전한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었을 때 내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내 자신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내 목회 현장 속에 찾아드는 수많은 오네시모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주님께서 주신 것이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 땅의 성도들. 각종 불건전과 신비주의에 물들어 바른 복음을 놓친 자들. 영적인 비밀을 알지 못하고 윤리와 도덕 때문에 맞추어 살다보니 한계를 느껴 교회를 빠져 나가는 교인들. 이 수많은 오네시모들을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 목회자들의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울의 시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꾼이 부족한 이 시대에, 교회 안에서 사명자를 찾아내어 그를 격려하고 힘을 주어서 자녀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는 교회의 심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땅의 오네시모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 그들은 마게도니아를 정복하는 복음의 일꾼이 될 것이며, 자신과 동일한 아픔을 지닌 영혼들에게 소망을 불러 일으키는 사역자들이 되어 이 땅의 지역 지역에, 요소 요소에서 충실히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현장 속에서 성령충만한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무엇인가? 우선 이 시대의 오네시모를 찾아내는 눈이 있어야 하며, 그 복음적인 시각을 가지고 찾아낸 영혼을 완전히 주께 맡겨 버리는 것, 즉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겨 버리는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하나님 떠난 마음과 생각으로 염려를 너무 자주하다 보니 체질화되어 버렸다. 특히 사람을 믿지 못하고 염려하는 수가 많다. 하기는 공동체 목회를 하면서 정주고 사랑주어도 떠나 버리는 그들로 인해 때로는 배신감도, 정죄감도, 불신도 싹튼적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휩싸인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불신앙이었는지 이제는 알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변화도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문제였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계획과 시간표에 따라 진행하시도록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자유한 일인가.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네시모들을 발견하는 눈이 열렸고 그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오네시모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자녀처럼 따뜻이 맞이해 주고 그들을 영적 노예 상태에서 영적 자녀로 해방시켜야 한다. 그런데 공동체 목회를 하면서 얻은 교훈 하나는 가만히 모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흩어지는 교회, 즉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져 세계를 복음화한 안디옥 교회의 모체가 되었듯이 변화된 오네시모들은 그들의 처한 자리로, 지역으로 파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으로 찾아가듯이 말이다. 돌아가는 오네시모는 이미 이전의 오네시모가 아닌 것이다. 사도 바울이 가장 고난을 겪었던 시기에 감옥 속에서 왜 그토록 간곡한 편지를 써야만 했는지 우리는 묵상해 볼 일이다.

이천 년이 지난 이 시대에 우리는 살아있는 복음을, 현장 안에서 생명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있는 복음을 되찾아야 한다. 복음이 윤리나, 도덕이나, 선행이나 철학의 차원으로 전락되어도 안 된다. 복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목회 현장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변화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열매가 씨를 터뜨려 흩어지듯이, 변화된 오네시모들, 나와 우리가 함께 복음들고 세계 만방에 땅끝까지 흩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 최초로 노예 해방을 선포한 바울의 편지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자유를 선포했듯이 말이다.

김서권 • 예수사랑교회 담임목사

출처 : ⌜교회와 신앙⌟ 성령충만한 삶을 위하여, 19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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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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